은주 = 가슴이 답답해서 왔어요. 아니, 가슴이 찢어질 거 같아요. 잠도 못 자요.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흐르기도 하고요. 스스로 생각하기에 아주 이성적인 사람이고, 온갖 힘든 상황도 혼자 힘으로 다 이겨낸 사람인데, 제가 이렇게 무너질 줄은 몰랐어요.
김 박사 = 많이 힘들어 보이네요. 언제부터인가요? 무슨 이유가 있을까요?
은주 = 남편이 동성애자라는 걸, 얼마 전에 알게 됐죠. 저는, 좋은 가족을 이룰 줄 알았어요. 만나서 사랑하고 그리고 결혼하고… 아이를 갖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남편이 비협조적이더라고요. 정말 몰랐죠. 어떻게 그럴 수 있죠? 어떻게 뻔뻔하게 결혼을 할 수 있을까요?
김 박사 = 가장 신뢰를 줘야 할 남편이 그랬다니 배신감이 들었겠습니다. 화가 나실 만해요.
집 떠나려 서둘렀던 결혼인데…
“결혼을 다른 목적으로 했다면 처음엔 만족해도 쉽게 불행해져”
은주 = 그건 다 말로 할 수 없어요. 처음에 배신감에 몸서리쳐지다가 나중에는 좌절감이 생기더라고요. 내가 못났나보다. 어떻게 그걸 눈치채지 못했을까. 박사님도 아시겠지만, 잘 설명할 수는 없지만 티가 난다고 하잖아요. 지금은 그냥 제가 큰 잘못을 저지른 것 같아요.
김 박사 = 남편의 행동이 문제지, 은주씨가 무슨 잘못이 있나요? 만에 하나 은주씨가 남편의 성정체성을 몰랐다고 칩시다. 그게 잘못은 아니죠. 결혼할 상대라면 당연히 미리 이야기를 했어야만 하고요. 그런데 남편은 무슨 생각으로 숨기고 결혼을 했을까요.
은주 = 제가 보기에 시어머니와 남편의 관계는 어떻게 보면 주종관계고 어떻게 보면 상호의존적 관계예요. 어머니는 아들에게 절대 복종을 원하고, 아들은 어머니를 전적으로 신뢰하는…. 언뜻 보면 이상적이지만, 당사자에게는 감옥 같은 곳이었나봐요. 그래서 가족들과 떨어지고 싶은데, 유일한 방법이 결혼이었을 거예요. 제 추측이긴 하지만 틀리지 않을 거예요. 제가 이용당한 거죠.
김 박사 = 은주씨는 왜 그 남자와 결혼하려 했죠?
은주 = 저 역시 가족에 대해 고민과 갈등이 많았어요. 집을 떠나고 싶어서 결혼을 서둘렀다는 걸 부정하지는 않겠어요. 서둘다보니 실수를 한 거죠. 두 사람 모두 가족을 떠나고 싶었고, 그때는 서로 사랑한다고 믿었고요. 남편은 직업이 의사고 저 또한 전문직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아주 행복한 가족을 만들 수 있다고 확신했거든요.
김 박사 = 후회를 해도 소용이 없겠지만, 과거는 결국 미래를 위한 것이니 제가 한 말씀 드리자면요. 결혼의 목적이 결혼 자체가 아닌, 다른 것이라면 불행해지기 쉬워요. 물론 사람마다 결혼의 또 다른 목적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그 부가적인 목적의 가치가 과장되면 안 됩니다. 지긋지긋한 현실을 탈출하기 위해 결혼했다면, 처음에는 목적을 이루었으니 만족스럽겠죠. 하지만 어떤 선택이든 대가가 따르게 마련이죠. 흔히 생기는 남편 또는 시댁과의 갈등으로 인한 심적 고통 같은 것 말이에요.
은주 = 남편이 제게 그러더군요. 그렇게 가족이 지긋지긋하면서, 왜 또 가족을 만들려고 하느냐고요. 만약 제 결혼의 목적이 원가족으로부터의 탈출이었다고, 제 가족을 만들면 안 되는 것일까요? 정말 잘못된 것인가요?
김 박사 = 반드시 그렇지는 않아요. 가족이 너무 싫어서 죽어도 결혼은 안 하겠다는 비혼주의자도 드물지 않죠. 하지만 반대의 경우도 있어요. 가부장적인 아버지가 싫어서 결혼을 거부할 수도 있지만, 정말 다정다감한 남편을 찾기도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가족 때문에 많이 힘들고 괴로웠다면, 마음에 품고 있는 이상적인 가족과 비교하는 심리도 한몫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만의 행복한 가족을 원하게 되죠. 여기에 ‘가족은 행복’이라는 학교와 사회에서의 학습 또한 큰 영향을 줍니다. 내 가족을 만들고 싶다는 은주씨 생각이 절대 잘못된 것은 아니에요.
정말 가족이 있어야 행복할까요
“전통적 부부의 틀에서 그렇지만 요즘엔 꼭 그렇다고 할 수 없어“
은주 = 아, 감사합니다. 제 마음이 그랬어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그래서 가장 행복한 가족을 만들어보고 싶었어요. 그런데 정말 가족이 있어야 행복해질까요? 요즘 저를 돌아보면, 차라리 결혼을 안 했으면 좋았을 것을 하는 생각이 들거든요.
김 박사 = 놀랍게도, 인간의 행복을 좌지우지하는 가장 중요한 조건이 바로 결혼입니다. 물론 예전의 연구 결과이니, 현시점에서 반드시 옳다고만 할 수 없지만요. 전통적으로 인간관계 중 제일 중요한 것이 부부 사이니까요. 결혼을 하게 되면, 자신의 흉금을 다 털어놓을 수 있고, 조력자로서 함께 인생을 짊어질 수 있다는 전제에서요. 요즘 보면 반드시 그렇다고는 못하겠죠. 결혼하고도 불행한 사람이 넘쳐나고, 결혼하지 않고도 즐겁게 사는 사람들이 많으니까요. 개인적으로 요즘은 서로 존중하고 신뢰할 수 있는, 그래서 가장 친밀한 관계를 지속할 수 있는 관계가 행복의 가장 중요한 조건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물론 그 관계가 전통적인 부부의 틀에 놓여 있다면 보다 안정적이기는 하겠죠.
은주 = 박사님, 그럼 전 어떻게 할까요? 뭔가를 바꾸기 위해 노력하기에 이미 지쳤어요. 현 상태를 그냥 유지하면 어떨까요? 이 나이에 혼자가 된다는 것도 무섭고, 우리 사회에서 이혼녀는 밑도 끝도 없이 죄인 취급하잖아요. 이혼이 부담이 아니라면 거짓말이에요. 엄청 큰 두려움입니다. 그래서 망설여져요. 사실 섹스리스부부도 많다고 들었어요. 그냥 부부 행세만 하고 살면 힘들까요?
김 박사 = 왜 두렵지 않겠어요. 사회적 편견과 싸우는 일은 절대 쉽지 않죠. 또 섹스리스부부가 늘어나는 것도 사실이에요. 섹스리스는 1년에 10회 미만, 한 달에 1회 미만 잠자리를 갖는 경우를 말합니다. 연구에 따라 다르지만, 30% 전후의 우리나라 부부들이 섹스리스라고 합니다. 은주씨 말대로, 그런 상태로 부부처럼 살 수도 있겠죠. 하지만 행복한 부부가 되기는 힘들죠. 섹스란 단순한 본능의 산물만이 아니에요. 아이를 낳는 생물학적인 목적도 있지만, 감정을 나누고 친밀감을 유지하는 중요한 소통의 수단이거든요.
은주 = 그럼, 이혼하라는 말씀인가요?
김 박사 = 선택은 은주씨의 몫이에요. 여러 가지 이성적인 판단을 거치면, 이혼을 하는 것이 더 옳다고 보죠. 그렇지만 다양한 이유 때문에 그렇게 못할 수도 있어요. 만약 현 상태를 유지한다고 선택했다 해도,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노력했으면 해요. 도망치기 위한 선택은 왜곡될 수 있어요. 용기 있게 스스로를 위한 선택을 해야죠.
제가 장녀라 자꾸 친정이 걸려요
“가족에게 당당히 마음을 말해야 ‘착한 딸’ 콤플렉스 벗을 수 있어”
은주 = 고민이 꼬리에 꼬리를 무네요. 가장 중요한 선택을 해야 하는 시점이잖아요. 그런데 자꾸 친정이 걸려요. 제가 맏이라서, 부모님이 더 많이 실망하고 속상해하실 거 같아요. 가족에서 떨어지고 싶었던 이유 중 하나가… 제가 짊어질 책임이 너무 컸기 때문이거든요. 제가 장녀지만, 그냥 어쩌다보니 먼저 태어난 것일 뿐이잖아요. 제가 원한 것이 아니라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보하고 책임지고 희생해야 하나요? 그래야 착한 딸인가요?
김 박사 = 상담 오시는 분들 중에 가족의 문제를 갖고 있는 분들이 많습니다. 설마 하실 수 있겠지만, 남보다 더한 부모·형제도 많습니다. 요즘 뉴스를 보세요. 자식을 학대하다 못해 저세상으로 가게 하는 짐승 같은 부모들도 있죠. 그 정도는 아니라도,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심하게 체벌하고, 아들선호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해 딸자식을 지나치게 차별하는 경우가 아직도 적지 않아요. 어른이 되어도, 자식의 삶을 저당 잡혀놓고, 자신들의 삶을 유지해 나가는 부모도 있고요. 마치 형제는 모든 것을 나누어야 하는 것처럼 경제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의존도가 지나친 경우도 있죠. 사실 이런 경우 최고의 명약은 독립이거든요. 어쩌면 유일한 치료제일 수도 있고요. 그러니 은주씨가 가족을 떠나고 싶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지 싶습니다.
은주 = 저처럼 결혼이라는 비상대책을 사용하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겁니다. 생각해보면, 결국 마지막까지 착한 딸로 남고 싶어서 그랬던 거 같아요. ‘저 집 딸은 가족과 사이가 안 좋아서 나가 살아’보다는 ‘부모가 잘 키워서 시집보냈어’라는 말을 듣게 하고 싶었던 거죠.
김 박사 = 은주씨의 결정 이해합니다. 문제는 그런 결혼의 불행한 결과도 오롯이 은주씨가 짊어져야 한다는 데 있죠. 아직 기회가 있다면, 가족들에게 은주씨의 상황과 마음을 당당하게 말하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세상 제일 소중한 것은 자신이라는 걸 표현해주었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착한 딸 콤플렉스에서 벗어날 수 있어요.
은주 = 짐작하셨겠지만, 친정도 그리 화목한 가족은 아니에요. 부모님 관계도 요즘 상당히 심각한 상태고요. 형제들과도 다툼이 좀 있었어요. 나이가 들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가족끼리 화목하지 않은 집들이 적지 않더라고요. 친구들의 그런 고백을 들었을 때, ‘우리 집만 그런 것이 아니구나’ 하는 위안도 되었지만, 너무 슬퍼지더라고요. 가장 오랜 시간을 나눈 부모·형제가 가장 편안한 관계가 되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김 박사 = 세상이 많이 바뀌고 있지만, 아직까지 가족이 모두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인 것은 변함이 없어요. 탄생, 생존, 성장 등 인생의 과정 중 많은 부분을 가족과 함께하잖아요. 부모·형제가 편안하고 안정되면, 당연히 우리의 삶도 행복해질 확률이 높죠. 그런데 모두가 쉽게 착각하는 것이 있어요. 가족이란 존재가 반드시 행복과 동의어는 아니라는 사실이지요. ‘아는 건 별로 없어도’ 생물학적으로 가족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무조건적으로 정신적으로도 끈끈한 유대를 가질 수 있는 건 아니죠. 서로에 대해 더 많이 알고, 그래서 더 많이 이해할 수 있어야 행복한 가족이 될 수 있어요. ‘아는 것이 많을수록 행복한 가족이 됩니다.’ 그러니 정말 가족의 행복을 원한다면, 더 많이 이해하고 소통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가족의 행복은 어쩌다 얻게 되는 선물이 아니랍니다. 행복해지고 싶다면 노력해야죠. 세상의 모든 행복은 노력의 결과니까요.
정신과 전문의 김진세 박사는 슬럼프 극복을 위해 떠난 산티아고 순례길에서도 ‘길 위의 카운슬러’로 나섰던 천생 상담가다. 고려제일정신과의원 원장으로 20년 이상 진료실에서 상담을 하고, 정신 건강과 관련된 수백편의 글을 써왔다. 저서로 <심리학 초콜릿> <행복을 인터뷰하다> <태도의 힘> <길은 모두에게 다른 말을 건다> 등이 있다.
June 26, 2020 at 02:33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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