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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September 13, 2020

[홍은전 칼럼] 처음부터 다시 : 칼럼 : 사설.칼럼 : 뉴스 -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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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식간에 우리를 늙은 돼지들이 사는 귀여운 세계로 데려갔기 때문에 모두 기분 좋게 웃었다. 하지만 그가 “제가 만든 동물들은 모두 웃고 있어요” 하고 말했을 때 그녀는 울고 있었다. “오늘 돼지들의 얼굴을 보니까 내가 그동안 무슨 짓을 했던 거지 하는 생각에….” 그가 말을 잇지 못했다. 우린 다시 도살장이 있는 현실로 돌아왔다.
홍은전|작가·인권기록활동가 어느 날 집으로 가는 길에 감자를 한 봉지 샀다. 다음날 ‘비질’에 가야 했기 때문이다. 비질은 서울애니멀세이브가 주최하는 행사인데 도살장 앞에서 소와 돼지들에게 물과 음식을 주는 것이다. 감자를 삶아 통에 담으니 제법 다정한 도시락처럼 보였다. 그러다 이것을 먹을 어린 돼지들의 운명을 생각하자 이내 가슴이 폭 내려앉았다. 나의 글쓰기 선생님은 ‘말로는 설명할 수 없다’ 같은 표현을 쓰지 말라고 당부했다. 글쓰기란 ‘굳이 말로 설명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동물권의 세계에 눈을 뜬 후 나는 번번이 글쓰기에 실패한다. 도저히 기존의 언어로는 내가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설명할 수가 없다고 느끼는 것이다. 도살장엔 지난겨울 이후 두 번째로 온 것이었다. 처음에 왔을 땐 슬프지 않았다. 곧 살해될 수많은 동물들을 보면서도 슬프지 않고 다만 불편했다. 잘 모르는 사람의 장례식에 온 기분 같았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두 번째 방문에선 돼지들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목구멍에서 울음이 울컥 올라왔다. 눈이 뒤집힌 돼지가 그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고 살아 있는 돼지들이 죽을 듯이 꽥꽥 소리를 질렀다. 지난번엔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던 것들이었다. 트럭엔 50여 마리의 돼지들이 타고 있었고 20분에 한 트럭씩 도살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것은 공장 안에서 컨베이어벨트가 돌아가는 속도였다. 세 시간 뒤 우리는 도살장 옆 시민공원으로 자리를 옮겨 이야기를 나눴다. 사람들의 말을 받아 적기 위해 노트를 펼쳤다. 나에겐 그들이 이 무참하고 잔인한 세계를 설명해줄 선생님 같았다. 흙(도자)으로 동물을 빚는다는 여성이 말했다. “동물들이 어릴 때 도축당하잖아요. 그들에게 자기의 생을 살게 해주고 싶어서 저는 나이 들고 늙은 동물들을 만들어요.” 그가 순식간에 우리를 늙은 돼지들이 사는 귀여운 세계로 데려갔기 때문에 모두 기분 좋게 웃었다. 하지만 그가 “제가 만든 동물들은 모두 웃고 있어요” 하고 말했을 때 그녀는 울고 있었다. “오늘 돼지들의 얼굴을 보니까 내가 그동안 무슨 짓을 했던 거지 하는 생각에….” 그가 말을 잇지 못했다. 우린 다시 도살장이 있는 현실로 돌아왔다. 취재를 온 기자였던 여성도 수첩을 내려놓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여기에 온다니까 친구가 그거 인간들이 죄책감 덜려는 거 아니냐고, 돼지들 놀리는 거 아니냐고 했어요. 정말 그런가, 이건 너무 인간 중심적인 행동인가, 마음이 복잡했어요. 그런데 오늘 돼지들이 너무 목말라하고 힘들어하는 게 보이니까….” 그가 침착함을 잃고 말을 잇지 못했다. 50m 너머에선 이제 막 도착한 돼지들의 비명 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왔고 공원은 야속할 만큼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그가 울음을 삼키며 말했다. “뭐라도 먹일 수 있어서 좋았어요.” 나는 울지 않았지만 이렇게 울 수 있는 사람들 옆에 있어서 슬프고 기쁘고 황홀했다. 행사를 진행하는 활동가는 말했다. “그들이 ‘물을 원한다’는 감각이 있어요.” 그러면서 오른쪽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분무기로 물을 주면 그들이 노즐을 아주 세게 물고 빨아서 분무기가 벌써 10개도 넘게 부서졌어요.” 그 말을 적으며 나는 감각이란 단어에 동그라미를 쳤다. 글쓰기 선생님은 좋은 글을 쓰려면 오감을 써야 한다고 말했다. 냄새와 촉감,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 모두를 잘 쓸 줄 알아야 한다고. 나는 그것이 언제나 힘들다고 느꼈는데, 이제야 그 이유가 쓰기 능력의 부족이 아니라 감각 능력의 부족이었음을 알겠다. 선생님이 나에게 쓰라고 한 것이 ‘글’이 아니라 보고 듣고 만지고 냄새 맡는 ‘감각’ 그 자체였다는 것도. 에스엔에스를 통해 매일 ‘새벽이’의 소식을 본다. 새벽이는 동물권단체 ‘디엑스이-코리아’의 활동가들이 공장식 축산 현장에서 ‘구조’한 국내 최초 돼지다. 기적처럼 살아 한 살을 맞이한 새벽이는 활동가들이 마련한 안식처 ‘생추어리’에서 기쁨과 슬픔, 자유와 외로움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다. 활동가들이 전하는 새벽이의 소식엔 놀랍고 새로운 감각이 가득하다. 나는 그들로부터 새로운 언어를 배운다. 언어를 배우는 것은 그 언어에 담긴 세계관을 배우는 일이기도 하다. 그들로부터 차별이나 폭력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해방이나 연대, 인간다움이나 아름다움, 사랑과 혁명에 대해서도 처음부터 다시 배우고 싶다. 이 세계를 감각하는 동물적 능력을 키우면서 동시에 그것을 인간의 언어로 설명해내고 싶다는 불가능한 꿈을 꾼다. 더 많은 ‘새벽이들’이 무사히 늙어가는 세계를 현실에서 짓고 싶기 때문이다. 많은 이가 함께해주면 좋겠다. (새벽이가 있는 블로그: blog.naver.com/dawnsanctuary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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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ptember 13, 2020 at 02:26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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